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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삶을 돌아보며…

저는 1964 년 직업군인으로 지내시던 아버님이 근무하셨던 서울 근교의 한 군부대 근처에서 2남 1녀중 막내로 출생하였습니다. 아버님이 전역하시고 나서  생활고에 시달렸던 가정 형편에 따라 지금은 장미공원으로 변한 중랑천에 인접한 무허가 철거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철거촌에 살던 사람들의 어려운 삶들은 혹은 서로에 대한 강한 정으로, 혹은 욕설과 폭력을 동반한 원색적인 분노로 표출 되곤 하였습니다. 거의 매일같이 각 가정마다 싸움과 폭력과 한 맺힌 울음들이 새어 나왔고 이러한 광경은 철거촌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였습니다. 저희 아버님도 한을 지니신 분이셨기에 거의 모든 날을 술로 보내셨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어려움들이 저희 집에서 흔히 재현되곤 하였습니다. 저녘마다 늘 싸움이 있었던 가정이었지만 학교에서 받은 우수한 성적표를 들고 가던 날에는 집안에 기쁨과 평화가 있었기에 제 어린 마음 속에 학업 성취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는 요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 속에 슬픔만 있는 것은 아니었고 지금 아이들과는 달리 제약 없는 자유로운 삶 속에서 친구들과 매일 지치도록 놀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서울 변두리에 집이 위치하고 있었기에 논과, 들과, 산을 누비며 자연을 가까이 하며 풀벌레들과, 물고기들과 야생화들을 접하며 키운 소양은 제가 자연을 연구하며 사는 과학자의 삶을 살게 된 기초가 되었습니다.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를 들어 가면서 막내인 저까지 대학에 보낼 형편이 안되리라 생각하신 아버님이 저에게 실업 전문 고등 학교로 지원하기를 원하셨지만 대학에 가면 제가 장학금으로 다니겠다는 당돌한 고집으로 아버님의 뜻을 거스리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추첨으로 다행히 어느 정도 명문의 모습을 지닌 좋은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가난한 아이들이 유난히 많았던 중학교에서나 상위권을 유지하던 저의 입학 성적은 보다 유복한 환경의 아이들이 많아진 고등학교 내에서는 중위권 밖에 되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 제게 주어진 기회가 많지 않음을 알았기에 남보다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저의 노력에 힘입어 입학 시에 중위 권에 머물던 저의 학업 성적은 빠른 진보를 보이며 향상하여 1 년 만에 반에서 상위 권에 이르게 되었고 졸업할 때 쯤에는 전교 1,2등을 다투는 데까지 향상되었습니다. 저의 노력에 의한 학업 능력의 진보는 선생님들의 눈에 띄었기에 늘 아이들 앞에서 칭찬받는 모범생으로 추켜 세워졌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영향이 저의 자아 형성에 좋은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때 얻어진 성취를 기반으로 한 자신감과 엘리트 의식의 해로운 독소들이 저의 성격을 독선적으로 만드는데 기여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대학 진학 성적도 좋게 나와 제가 원하던 서울대 자연대 특정 과에 거의 최 상위권으로 입학하였고 4년 내내 상위 성적을 유지하며 아버님에게 약속했던 것처럼 장학금으로 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같은 대학에서 만나 사귀던 아내도 이 때 만나 결혼을 약속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때 늘 저를 사랑으로 키워주신 어머님께서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면서 큰 흔들림이 있었습니다. 어머님의 명복을 위해 어머님이 가끔 다니시던 절에도 다녀보게 되었고, 죽음에 대한 답이 있는가 하여 몇 번 명동성당에도 나가 보았지만 어디서도 죽음에 대한 답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 때 쯤 해서 UC Berkleley 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고 국비 유학 시험도 무난히 통과하여 경제적으로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 유학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유학 시절 초기에는 좋은 학업 성적으로 미국 학생들을 제치고 장학금도 받을 수 있었고 졸업할 때 쯤에는 제 분야의 주요 학회에서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인정 받아 소수의 학생에게만  주는 학회장 상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유학 직전에 있었던 우스운 이야기를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결혼에 앞서 천주교에 다니던 집 사람과 천주교에 열심이시던 장모님을 위해, 집 사람과 장모님과 함께 천주교 신부님과 면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이 여러 말씀을 하시는 내용을 거의 마음에 두지 않았는데 말씀을 마치실 때 쯤 저에게 자녀들을 천주교 식으로 키울 것을 서약하라는 요구를 하였습니다. 아이들이 커서 선택할 일을 왜 내가 서약하여야 하는가 하며 한 시간 쯤 버티다가 사색이 되어 가시는 장모님의 표정을 보고 생각을 잠시 해보게 되었습니다. 사는 동안 거짓말을 안하고 사는 것도 아닌데 결혼 하려고 거짓말 하나 더하는게 무슨 대수인가 생각하여 못 이기는 척 거짓으로 서약하였습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저의 마음 없는 서약도 하나님이 기억하셨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때 쯤 해서 몇가지 정리하길 원하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 같이 한국에서 유학 온 사람들과는 친하게 지내며 자주 만나 교제하였고 일요일에는 간단한 술도 나누며 어려울 수도 있는 유학시절의 시름을 함께 달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하나씩 슬며시 이민 교회를 나가게 되었고 저와 보내던 일요일의 교제 권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섭섭하기도 하였고 특별히 전도에 열심인 한 유학생 위주의 교회가 있었는데 이 곳에 다니던 사람들이 오 가는 길에서 저를 붙잡고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기독교를 자주 들이대는 것이 제게는 고역이었습니다. 종교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에 이야기 하기를 피하여도 기회가 될 때마다 자신들의 종교를 들이대는 사람들과 4년 간에 걸쳐 적지 않은 언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만남이 많아 질 수록 저의 반대 의견도 체계화 되면서 기독교에 반하는 20 가지 정도의 논지들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다 기억은 못하지만 제가 나눴던 한가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신 혹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지 못합니다. 설혹 당신들이 말하는 하나님이 존재 한다 하더라도 나는 개의치 않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하나님을 만났을 때 내가 믿지 않았던 이유를 항변할 수 있으니까요.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을 믿을 수 있는 환경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불교를 따르는 가정에서 태어났고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살려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돈을 추구하지도 않았고 자연의 신비를 밝히는 일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며 돕기를 원하였습니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저를 전도하려는 사람 들과 대화 할 때는 강한 투지로 맞서는 저였지만 혼자 있을 동안에는 약한 모습도 지녔던 것 같습니다. 제가 박사 과정에 다루던 기계가 그 당시에 미국에서 몇 대 되지않는 비싼 전자 현미경이었습니다. 학생이 쓰기에는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기에 남들이 기계를 쓰지않는 늦은 밤에 혼자 실험을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도 없는 건물에서 혼자 밤 늦게 암실에서 필름을 현상할 일이 많았습니다. 타고나기를 겁이 많은 저였기에 가끔 가다 드는 무서운 생각이 저를 붙잡을 때가 있었습니다. 암실의 어두운 붉은 불 빛 아래에서 필름 현상으로 인해 문도 열지 못하고 갇혀 있는 한 두 시간 동안 두려운 생각이 몰려 오면 저도 모르게 어릴 때 교회에서 나눠주는 사탕에 현혹되어 잠시 다니던 교회에서 외웠던 주 기도문을 외우곤 하였습니다. 두려움 속에서 저를 보호해 줄 어떤 선한 존재의 도움을 구하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일주일 전 꾸게 된 꿈도 제게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기억나는 생시 같은 꿈이었습니다. 꿈 속에서 해골과 뼈만 남은 무서운 존재가 저를 좇아 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 두려워서 뒤 돌아서서 도망치기 시작하였는데 앞 저 멀리서 거대한 거인과 같은 존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거인이 얼마나 컸던지 그 무릎이 구름에 닿아 있었고 무릎 이상은 짙게 덮인 구름으로 인하여 볼 수 없었습니다. 꿈 속에서 저는 좇아오는 해골과 뼈의 존재를 사단이라 여겼고 앞에 있는 거대한 존재를 예수님이라 여겼습니다. 저는 두려움 속에서 “예수님 믿을께요. 살려 주세요.” 를 크게 외치며 확 잠에서 깨어 날 수 있었습니다. 잠을 깨고 나서 비록 두려움이 다 가시지는 않았지만 저의 의식이 회복되자 저는 “에이. 개꿈이네” 하며 꿈 속의 두려움을 떨쳐 버렸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일주일 후 봄 방학을 맞아 LA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그 곳에 사시며 목사님으로 수고하시는 고모부님 집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고모부님과 전에도 여러 번의 접촉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예수님의 말씀을 하시면 가만히 듣는 척하다가 대화를 피해 버리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악몽의 여파로 인해 사단의 존재에 대해 제가 물어보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이야기가 늦게까지 이어졌고 저와 고모부 둘 만 남게 되었습니다. 고모부님은 저에게 무릎을 끓고 기도로 예수님을 영접하라는 거의 반 강제적인 요구를 하셨습니다.  어른 앞에서 무릎을 끓는 것이 익숙한 저였기에 무릎은 끓었지만 기도는 하기를 원하지 않았기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있는 지 없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나쁜 삶을 살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또 죽으면 천국에 간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좋게도 여겨집니다. 마음 속에 믿음을 갖는 것이 사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주장도 동의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면 정말 존재하기에 믿어야지 있지도 않은 존재를 믿고 싶다는 막연한 희망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고모부님은 하나님의 존재가 증명 될 수 있다고 하시면서 다음 성경 구절을 보여 주셨습니다. 로마서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이상하게도 이성경 구절 중 핑계하지 못한다는 구절이 제게 강하게 들어왔습니다. 아마도 기독교의 신은 내가 지금까지 전도하러 온 사람들에게 왜 내가 기독교를 믿지 않는지에 대해 주장해 온 논리들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말대로 제 인생에 나타나 분명히 보여 알게 된 것이 있는지를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때 몇가지의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먼저 저에게 예수님을 전하며 다가왔던 사람들이 떠올랐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사람들이 전하려 한 말들이 기독교 신을 대변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제가 공포가 생길 때면 주기도문을 외우던 장면이 떠 올랐습니다. 어쩌면 내 혼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몇일 전 꾼 생시와 같은 꿈 속에서 본 사단과 예수님의 모습이 영적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한 생각이라 모든 것이 납득 된 것은 아니지만 기도를 하기로 응낙하고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고모부님이 기도를 처음 하는 저를 위해 기도를 따라하라 말씀하셨는데 뜻도 모르고 따라한 기도 내용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간단히, 제가 예수님을 거부해온 죄인이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으며, 앞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따라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뜻도 모르고 기도한 끝에 저의 말로 이렇게 기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 전 당신이 계신지, 안계신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이 시간 제 마음을 여니, 당신이 실제로 계시다면 저에게로 오세요.” 이 기도를 마친 시간이 새벽 2~3 시가 되었기에, 먼저 자고 있는 집 사람 곁으로 가서, 집 사람을 흔들어 깨우고 “내가 예수님 믿는 기도를 했어” 라며 집사람에게 기도한 사실을 전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집 사람은 잠 결에 들은 말에 그저 잘했네 하고는 돌아 누어 다시 잠이 들어 버렸습니다. 저도 자리에 누워 반쯤 잠이 들었을 때 갑자기 천장에서 배구공 만한 빛 덩어리가 천천히 내려와 제 왼쪽 가슴에 들어오는 것을 경험하였고 가슴이 따뜻해 지는 것을 느끼며 곧 잠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 날 일어나 고모부님에게 성경 말씀을 더 배우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과, 성육신의 의미들을 더 배우게 되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다시 제가 살던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느낀 것은 신기하게도 제가 그 동안 기독교에 대적하며 가졌던 20 개의 의문의 대부분이 생각이 나지 않게 된 것이었습니다. 집 사람이 이미 다니던 교회에 거의 처음으로 출석하여 목사님의 설교를 평생 처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 들어보게 되었습니다. 그 설교 후 목사님이 예수님에 대해 헌신하고 싶은 사람은 단상 앞에 나오라는 초청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의 눈에 목사님이 부르고 있었지만 목사님 너머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는 모습을 느낄 수 있었기에 담담히 저도 앞으로 나가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저의 행동이 저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 알고 있던 여러 교회 분들을 놀라게 하였고 예배 후 많은 축하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 저를 위해 여러분들이 기도를 해 오고 있던 사실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니 삶에 큰 변화가 갑자기 찾아옴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가까이 지내던 예수님을 믿지 않던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전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예수님을 믿은 후 몇 일이 되지 않아 친구들을 찾아 다니며 예수님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친구들이 의아해 하며 조금씩 저를 피하기는 했어도 몇 명은 예수님을 믿어 몇 십년 넘은 지금까지 신앙도 함께하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 믿고 몇 년 간을 거의 매일같이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 시절에는 예수님과 복음에 대한 지식이 없이 예수님을 전하다 보니 실수도 있어서 성경을 더 알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믿은 지 3달 만에 성경 전체를 읽기를 마쳤습니다. 그 후에도, 일년에 적어도 6 번 이상의 분량으로 성경을 읽는 노력을 예수님을 믿은 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성경을 그 쓰여진 본래의 원어 그대로 알고 싶어, 히브리와 헬라어를 배워 성경 전체를 원어로 4 번 읽을 기회도 있었습니다. 성경 지식이 늘어감에 따라 성경을 가르칠 수도 있게 되어 예수님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성경을 나누며 수십 명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전하는 축복 이외에도 예수님의 은혜가 저와 함께 하셔서 저의 삶의 필요와 가족들을 축복하시는 것도 늘 경험하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두운 영의 세력을 이기는 주님의 능력이 제 속에 역사함을 신뢰하게 되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예수님 만날 기쁜 소망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던 시절, 알지 못해 예수님을 대적하였던 저를 기도하게 하셔서 주님 믿게 하신 예수님의 은혜가 글을 쓰면서 다시 감사가 됩니다. 예수님 믿고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이 제 어머님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돌아 가셨고 제가 어머님께 예수님을 전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슬픈 일들이 다른 사람에게 반복 되지 않도록 더 바삐 예수님을 전하여야 함을 생각해보며 제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으셔서 자신이 복된 인생 살다가 천국 가실 뿐 만 아니라 가족과 주변에 있는 귀한 영혼들에게 축복의 씨앗이 되시는 일이 있기를 기도 드립니다.

로마서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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